지난 15년간 청년과 자영업자, 불안정한 일자리에 놓인 노동자 등 수많은 사람들의 재정 문제를 상담하며 저는 돈이 단순한 숫자를 넘어, 한 사람의 삶과 정서를 규정하는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생활경제의 해법을 고민하고, 금융 교육을 진행하며, 사회적 금융과 자조조직을 연구하고 돕는 일을 해왔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느낀 것은, 우리 사회가 돈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 불안은 주식과 가상자산이라는 형태로 폭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상담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면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빨간색과 파란색 숫자에 따라 그들의 얼굴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습니다. "이번에 투자한 코인이 10배 올랐어요!"라고 흥분했던 청년이 불과 몇 달 뒤 "결혼 자금을 다 날렸어요"라며 무너져 내리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들에게 주식과 코인은 단순히 돈을 불리는 행위를 넘어선, 삶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가 목격한 것은 불안이 해소되기는커는, 오히려 더 큰 불안으로 증폭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단순히 '탐욕'이나 '투기'로 치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 손을 내밀었던 이들은 탐욕스러운 투기꾼이 아니라, 생존 본능에 휩쓸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며, 우리가 왜 이렇게 불안한 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진정한 가치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불안이 낳은 생존 전략 : 왜 우리는 투기하는가
우리 사회의 고도 성장기에는 성실한 노동과 저축이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가장 확실한 사다리였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저축하고, 그 돈으로 집을 사고, 자녀를 교육시키며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는 것이 당연한 삶의 서사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사다리를 보지 못합니다. 월급은 제자리걸음인데, 집값과 자산 가격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10년, 20년을 일해도 서울에 집 한 채 살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월급은 쥐꼬리만큼 오르는데 집값은 하루아침에 몇억씩 뛰는 걸 보면, 노동의 가치라는 게 허무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주식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은 제가 상담했던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처럼, 주식 열풍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만 뒤처지면 어쩌지', '벼락거지가 되면 어쩌지' 하는 절박한 공포에서 비롯된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2023) 자료는 소득 불평등을 넘어, 자산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자산이 있는 이들은 가만히 있어도 부가 늘어났지만, 자산이 없는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저는 지난 15년간의 상담 경험을 통해 이 현상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금리 정책으로 자산 시장이 과열되고, 주거 안정성이 흔들리면서 돈을 불리는 행위만이 유일한 탈출구처럼 인식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불안을 견디다 못해, 더 큰 불안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안정적인 삶’의 가치
하지만 주식 투기가 우리에게 진정한 안정을 가져다주었을까요? 저는 상담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등락하는 시장에 일희일비하며 보내는 시간은 삶의 질을 갉아먹는 독이 되었습니다. 주식 때문에 가족과의 대화는 줄고, 친구와의 관계는 소원해지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던 투자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소중한 가치들을 희생하고 있었을까요? 저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숫자가 아니라, 마음 편히 잠들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평온함이 아닐까요?
진정한 부는 통장 잔고의 숫자가 아니라, 내가 가진 시간과 경험, 그리고 관계의 풍요로움에서 온다고 믿습니다. 이 글은 그 믿음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재테크'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우리 사회의 민낯을 직시하고, 돈과 삶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며, 모두가 불안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를 투기로 내몬 ‘벼락거지 공포’의 실체에 대해 제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더 깊이 있게 파고들겠습니다.
[참고 자료]
통계청. (2023). 『가계금융복지조사』.
한영섭, 『청년 부채 현황 진단과 과제』, 세상을 바꾸는 금융연구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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