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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이주형의 사소(思小)하게] 나는 소비자라는 말이 싫다

금융리터러시 2017. 2. 8. 00:10
'sous rature'란 말이 있다. (불어 발음을 그대로 옮기기 어려워서 굳이 한글로 적지 않는다) 영어로는 보통 'under erasure'로 번역되는 모양인데, 우리말로는 '말소하에 둠', 또는 '지움 아래'로 곧잘 쓰인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The FundamentalConcepts of Metaphysics)에서 처음으로 제기하고,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차용해 광범위하게 쓴 개념으로, '적절한 용어는 아니지만 달리 대체할 만한 말이 없으므로 일단 쓰고 삭제 표시를 해두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19세기 말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당연히 automobile이란 말이 나오기 전이다) 사람들은 딱히 뭐라 불러야할지 몰라서 자동차를 '말 없는 마차(horseless carriage)'라고 불렀다. -지금도 자동차 성능을 표시할 때 마력(馬力)이란 용어를 쓴다-  'sous rature'식으로 표시하자면 '말없는 마차' 쯤 될 것이다.

나도 'sous rature'로 표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소비자'란 말이다. 지구라는 생태계에 발붙이고 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나는 '소비자'란 말로 불리고 싶지는 않다. 내가 어렸을 적 만해도 소비는 미덕이 아니었다. 저축이 미덕이었다. 뭐든 함부로 '쓰고 버리는' 것은(특히 먹거리) 천벌 받을 일이었다. 

'쓰고 버리는' 것이 바로 '소비'(consume)라는 말의 원뜻이다. 'consumere'라는 라틴어에서 온 이 말은 써버리다(use up), 버리다(waste)란 뜻을 가지고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이 말에서 'consumer'(소비자)가 파생됐는데 '낭비하거나 버리는 사람'("one who squanders or waste" : onlineetymology dictionary)이란 부정적인 어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consumer'란 말을 '소비자'(消費者)로 번역한 것은 서양에서 온 대부분의 개념어가 그렇듯이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추측컨대 일본인의 꼼꼼한 성향상 원어의 뉘앙스에 가까운 한자어를 찾지 않았을까) '消'(소)자는 진나라 때부터 쓰인 글자이고 '費'(비)자는 주나라 때 청동기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전문이 모두 존재하는 오래된 형성자로서 각각 사라지다, 소모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일본 한자학의 대가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1910-2006)가 쓴 상용자해(常用字解: 쑤빙 역, 2010년 중국 구주출판사 본)라는 책을 보면 특히 '費'(비)자는 재물이나 재화를 '낭비하다'라는 원뜻을 가지고 있었고, 본디 부정적인 속뜻이 있었다("費" 原來也有否定涵義)

부정적인 함의를 가진 소비가 미덕이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끝없는 탐욕과 소유욕이 있지 않은가 싶다. 끊임없이 뭔가를 새로운 물건(알고 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도 마케팅의 힘을 빌어)인양 출시하고 그게 빨리, 많이 쓰인 뒤 싫증나게 만들어 대량으로 버리게 하고 또 다시 많이 만들어 빨리 쓰고 또 싫증나게 하는 악순환-그들 말로는 선순환- 시스템말이다. (나도 늘 당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니기는 하다)구글N그램 뷰어 상1800년부터 지금까지의 영어로 된 책을 분석해 특정 단어가 어느 시기에 얼마나 많이 쓰였는지 분석해주는 구글 N그램 뷰어를 보면 'consume'과 비슷한 빈도로 쓰이던 'consumer'는 20세기 초인 1905년 역전을 시작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기 시작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 하는 시기와 겹친다는 뜻이다. 이후 미국에서 소비자물가지수(consumer price index)란 용어가 등장한 1919년까지 빠르게 상승하고,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0~40년도 사이의 상승기를 거쳐 1965~1980년에 최정점을 찍는다.

그렇게 세상은 시나브로 '소비자'란 말에 둔감해져 왔다. 이윽고 '소비자'는 왕이 되었다. 이제 소비를 하지 않는게 악덕이 됐다. 한국에서도 소비자보호법(1980년 제정. 후에 소비자기본법으로 변경)이 제정되고 공공기관인 한국소비자원(1987년 한국소비자보호원으로 설립 후 명칭 변경)이 생겼다. 민간에서도 한국소비자연맹(1970년)이 설립됐고, 심지어 생태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환경NGO 측에서도 녹색소비자연대(1997년)란 단체를 만들었다. 나는 '녹색'과 '소비자'란 말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물론 과거보다 훨씬 편리하고 손쉽게 -돈만 있으면- 사서 쓰고 버리는 사람들이지만 단순히 그걸 넘어 더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여야 하고 그렇게 불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불린다면 우리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뭐라고 써야할지 그걸 아직 모르겠다는 거다) '소비자'는 왠지 자기 폄하적으로 들린다. 인간 나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잉여'같다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이런 에세이를 쓸 때나 (특히나) 기사를 쓸 때면 가능하면 '소비자'란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소비자'란 말에 찌든 것이다. 현명하신 독자들께서 이를 대체할 좋은 낱말이나 조어를 한번 생각해봐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다.




P.S 구글 N그램뷰어를 보면 이제 'consumer'란 말도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대신 엄청난 속도로 자주, 많이 쓰이게 된 말이 있으니, 그게 바로 'user'(사용자?)다. 소비자보다는 가치중립적으로 느껴지는 이 단어가 열어갈 세계는 무엇일까? 

 
     

이주형 기자(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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