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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정보

단어장 - 신용

by 금융문해 2017.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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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 (信用보기) 중급

발음  [시ː뇽]

명사

  1. 1.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 또는 그 믿음의 정도.
    • 낮은 신용.
    • 신용이 떨어지다.
    • 신용을 떨어뜨리다.
    • 신용을 얻다.
    • 신용을 잃다.
    • 민준이는 거짓말을 잘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신용이 없다.
    • 수시로 말을 바꾸는 행동은 자기 스스로 신용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신용을 쌓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1. 2.물건이나 돈을 먼저 받고 대가를 나중에 지불할 수 있는 능력. 또는 그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상황.
    • 신용 등급.
    • 신용 불량.
    • 신용 수준.
    • 신용이 나쁘다.
    • 신용이 악화되다.
    • 신용을 판단하다.
    • 은행에서는 그의 신용을 확인하고 대출을 승인해 주었다.
    • 현대 사회는 신용 사회이기 때문에 신용이 없는 사람은 카드도 만들 수 없다.
    • 현명한 경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으로 신용을 관리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신용이란

신용이란, 미래 일정 시점에 갚을 것을 약속하고 돈을 빌려 쓰거나, 상품, 서비스를 미리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빌리는 사람이 정해진 이자를 지불하고, 정해진 기간 내에 돈을 갚을 것을 믿고 자금을 제공합니다. 즉 빌려주는 사람과 빌리는 사람 사이에 신뢰, 신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신용을 사용하면, 현재 돈이 없어도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고, 사고나 질병 등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큰 지출이 생길 때 돈을 충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금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고, 해외에서도 간편하게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대출받은 자금이나 신용카드 사용액을 연체 없이 성실하게 갚으면, 신용도가 높아져서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고, 수수료 감면 등 다양한 부대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신용거래에 있어서 주의할 점

그러나 신용거래를 하면 부채가 생기고, 부채를 갚기 위해서는 미래의 생활비를 줄여야 합니다. 원금 뿐 아니라, 이자, 서비스 수수료, 연체료 등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또한 현금이 없어도 신용거래로 구매가 가능해 짐에 따라, 충동구매와 과소비의 위험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과도한 신용거래로 부채를 제 때에 갚지 못하면 파산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신용사회라고 할 만큼, 모든 경제활동이 신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용은 한 사람의 지불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수단이고,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에 신용을 잘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용거래를 할 때는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자신의 능력으로 갚을 수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용거래를 한 후에는 연체를 하지 않도록 관리하여, 신용등급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신용등급에 따라 돈을 빌릴 수 있는 한도금액, 이자 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소비자 금융과 신용 판매

신용거래는 소비자 금융(일반 가계대출)과 신용판매로 구분됩니다.

- 소비자 금융
소비자 금융이란 일반 가계대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금융회사에서 개인이나 가계에 자금을 빌려주고 미래 정해진 시기에 빌려준 자금에 대한 지불이행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금융회사의 담보부 대출과 신용대출,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대부업체를 통한 사금융이 일반 가계대출에 포함됩니다.

- 신용판매
신용판매란 상품이나 서비스의 판매업자가 물품이나 용역을 판매하고 그 대가를 일정 기간 후에 결제 받는 일종의 외상 판매를 말합니다.

신용판매를 취급하는 금융회사에는 자동차나 냉장고 등의 값비싼 내구재를 구입할 때 장기 할부로 자금을 빌려주는 할부금융회사나 캐피탈 회사, 제품과 서비스의 구입 대금을 일시 또는 할부로 결제 받는 신용카드회사 등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판매업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할 목적으로 소비자에게 직접 신용판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품의 거래는 신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신용판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조어
신용, 신용거래, 소비자 금융, 신용판매

[네이버 지식백과] 신용이란? (똑똑한 금융내비게이션, 2012. 5. 17., 금융위원회)


사물의 민낯

신용

어떻게 신용불량자가 되는가

요약
① 사람이나 사물이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하지 아니함. 또는 그런 믿음성의 정도
② 거래한 재화의 대가를 앞으로 치를 수 있음을 보이는 능력. 외상값, 빚, 급부 등

신용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신용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신용’이라는 말에 무엇이 연상되냐는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용카드, 연체, 파산”이라는 대답을 한다. 신용카드 대란, 신용불량 파동, IMF 사태 등으로 신용이라는 개념이 소비적/부정적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신용은 흔히 자본주의의 고도화로 인해 최근에 창안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통념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 문헌에도 등장하는 신용

이집트 문헌에도 등장하는 신용

신용이라는 용어는 기원전 이집트 문헌에도 등장한다. 사람들이 직접 가지고 있는 것을 물물교환하던 시절에는 거래 규모의 한도가 개인이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의 양으로 한정돼 있었기에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신용은 외상거래에서 시작

신용은 외상거래에서 시작

“이봐, 우리 이러지 말고 한두 번 거래한 사이도 아닌데 우선 서로 교환을 하기로 하고 며칠에 걸쳐 운반을 해주면 훨씬 편하고 좋지 않을까?”

“뭐 그러도록 하지. 대신 약속은 꼭 지켜야 해.”

거래 쌍방이 약속된 날짜에 물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확신하에 외상거래가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경제 규모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어쩌면 문명과 대도시의 탄생은 외상, 그리고 외상을 가능케 한 쌍방의 확신 즉, 신용의 발명에 크게 힘입었다고 할 수 있겠다. 외상을 하고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을 통해 자본주의는 발전해 왔다. 다만 문제는 ‘어떤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이 사람이 약속을 이행할 확률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까’였다.

은행가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은행가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산업혁명 이전까지 신용의 평가는 상당히 주관적으로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돈을 빌려주는 쪽이 안심이 되면 상대의 신용은 높은 것이고, 돈을 빌려주기 꺼려지거나 불안해지면 신용이 낮은 것이었다. 그에 따라 대출을 해주느냐 여부, 그리고 이자율의 높고 낮음이 정해졌다. 이런 불합리한 신용평가로 인해 사람들은 외상이나 대출을 꺼리게 되었다. 은행가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처럼 보였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대부업자

<베니스의 상인>을 쓴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을 쓴 셰익스피어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살 1파운드를 내놓아야 할 것이오!

<베니스의 상인>에서 대부업자가 한 말이다. 그가 이런 악랄한 인물로 묘사된 것은 아마 신용 거래에 있어 돈을 빌려주는 쪽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업자만을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반드시 원금을 회수하고 이자를 통해 수익을 남겨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 눈앞에 있는 사람을 확실히 평가해야 했고, 돈을 떼먹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 장치가(때때로는 협박이나 인질과 같은) 필요했다.

신용평가회사,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

신용평가회사,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
신용평가회사,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

그런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때 나타난 것이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무디스(Moody's)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Standard&Poor’s)였다. 이들은 각 기업의 자금 상황과 성장 여력, 지금까지의 신용거래 실적을 토대로 채권별 등급을 매겼다.

AAA부터 BBB의 ‘투자적격 등급’과 BB 이하의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채권을 나누고 위험도에 따라 합당한 이자율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 채권의 발행과 상환이 계속되면서 신용평가회사들은 공신력을 갖게 되었다. 중간의 매개자 혹은 보증자가 존재하자 신용거래에 대한불안은 점점 줄어들었고 점점 기업 활동은 차입을 전제로 행해지게 되었다.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신용평가사

신용평가사는 점차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신용등급이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순간 차입금에 대한 이자가 순식간에 높아질 수도 있었고, 불안한 투자자들이 즉시 상환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영향력을 늘려가게 된 무디스와 S&P는 점차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의 신용등급도 평가하게 되었다.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신용평가사

이윽고 그들은 절대 권력으로 성장했다. 차입경영과 유한책임 제도가 정착돼 가면서 물리적인 회사의 규모와 자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졌고, 그 신용은 전적으로 그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

마이클 밀큰의 패러다임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난 마이클 밀큰은 숫자와 인연이 큰 삶을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경제학도의 길을 밟고 버클리를 졸업한 후 금융으로 유명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와튼 스쿨MBA을 거쳐 금융가가 되었다. 졸업 이후 그는 1970년 ‘드렉셀 번햄 램버트(Drexel Burnham Lambert)’라는 투자은행에 입사해 월가와 인연을 맺게 된다. 금융계에 입성한 이후 밀큰은 지금껏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금융의 균열점을 인식하게 된다.

마이클 밀큰의 패러다임

■ 기존의 신용평가 체제는 과거의 실적을 기준으로 대출 여부와 이자율을 결정한다. 그렇지만 그런 회사들은 처음부터 거대한 회사였을까?

■ 수치화된 과거 실적만 바라보고 저리의 이자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신용등급과 실제 건실함의 괴리를 보이는 중소 회사의 채권을 노리면 어떨까?

밀큰이 신생기업에서 금광을 발견하다

그는 전통적 거대 기업들을 무시한 채로 사업성이 밝고 상환 능력이 뛰어난 신생 기업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실제 상환 능력이 높음에도 그들은 회사채를 발행하기도 힘들었고, 발행한다 하더라도 신용평가 기관에 의해 투자부격적 등급을 받아야 했다.

밀큰이 신생기업에서 금광을 발견하다

밀큰은 그런 기업들을 “천국에서 쫓겨난 천사(fallen angel)”라고 불렀다. 실제 전망성이 있음에도 평가 기관이 낙인찍은 신용등급은 사람들이 그를 못 보고 지나치도록 만들었다. 누구도 보지 못하는 금광을 발견한 밀큰은 환호했다.

마이클 밀큰의 성장

마이클 밀큰의 성장

분명히 부실해야 했던 회사들의 채권 값이 오르고 상환도 신용도와 다르게 잘 이루어지자 사람들은 놀라기 시작했다. 시장의 자금은 밀큰에게 모이기 시작했고 전성기의 밀큰은 한화로 140조에 이르는 자금을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1987년 밀큰의 연봉은 5억 5천만 달러, 그의 팀원들도 그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업계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정크 본드의 제왕, 마이클 밀큰

누구도 알지 못했던 금광을 독점한 밀큰은 “정크 본드(junk bond)의 제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정크 본드란 쓰레기 채권이라는 뜻으로 고수익채권, 열등채라고도 부른다. 정크 본드의 재발견은 그와 그의 고객에 이득을 안겨주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금융 시장의 관행 때문에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했던 중소 규모의 기업들은 밀큰을 통해 손쉽게 자금을 융통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한 적극적 시설 투자와 연구 개발은 1990년대 이후 미국이 지식기반산업의 중심을 이끄는 토대로 작용했다.

정크 본드의 제왕, 마이클 밀큰

거창하게 말하면 밀큰은 그전까지의 패러다임, 기업의 부익부(rich get rich)를 적익부(fit get rich)로 이행시켰다고 할 수 있다. 덩치를 불리고 계열사를 늘리던 과거의 경제에서 확실하게 핵심 역량을 가지고 선택과 집중을 한 밀큰은 ‘신용의 재해석’을 통해 이 모든 성공을 이룬 것이다.

마이클 밀큰, 덫에 걸려 비참한 몰락을 맞다

밀큰, 덫에 걸려 비참한 몰락을 맞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밀큰은 비참한 몰락을 맞이하게 된다. 기업사냥꾼 혹은 중개인으로 불리던 이반 보예스키 때문이었다. 그는 내부 거래와 주가 조작에 깊게 관여하던 어둠의 인물이었다. 각종 금융 범죄를 저지르다 꼬리가 길었던 탓에 증권거래위원회(SEC)에게 포착되어 검거되고 만다.

“저…… 검사님 저랑 연관된 사람 중에 거물이 있으면 형량을 줄여주실 수 있나요?”

“어떤 거물이냐에 따라 다르지. 누군데?”

“마이클 밀큰이라고…….”

“뭐? 그래.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마이클 밀큰, 10년형을 받다

밀큰, 10년형을 받다.

보예스키는 감형을 받기 위해 마이클 밀큰을 끌어들였다. 밀큰이 정말로 그와 손을 잡고 내부자 거래와 사기를 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검찰이 밝혀낸 것은 밀큰이 보예스키와 통화를 한 적이 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검찰은 98개 죄목으로 밀큰을 압박했고 만약 패소할 경우 500년 형을 언도받을 참이었다. 밀큰은 타협을 해 몇 가지 항목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10년형을 받게 된다.

어떻게 신용불량자가 되는가?

어떻게 신용불량자가 되는가?

국가나 법인뿐 아니라 개인의 영역에서도 신용의 중요성은 몇 년 사이 크게 늘어났다. 현금 기반의 경제생활은 점차 막을 내리는 듯 보인다.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도 후불제 교통카드를 이용하고 물건을 살 때는 신용카드를, 집을 살 때는 융자를 이용한다. 이 모든 활동은 높은 평점의 신용등급이 없다면 유지할 수 없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계 대부업체들

우리나라의 경우 IMF 이전까지 신용 대출은 큰 장벽이 아니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은행을 통해 돈을 빌릴 수 있었고 이자율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사금융 시장만 해도 이자제한법에 의해 24~36% 금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애초에 보통 사람들은 사금융을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일본의 대부업체들

일본의 대부업체들

그러나 IMF 이후 은행은 대출 규모를 줄이고 신용등급을 까다롭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자제한법도 폐지되어 상한 금리는 66%로 증가했다. 옆 나라 일본의 상한 금리는 29%, 한국의 상한금리에 매력을 느낀 일본계 대부업체는 그때를 기점으로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앤캐시, 산와머니 등이 대표 업체이다.

저신용자들이 사금융을 이용하는 이유

그들이 매력을 느낀 건 높은 상한 이자(이후 점차적으로 줄어 44%까지 내려왔지만 그래도 상당히 매력적인 수치)뿐만이 아니었다. 마이클 밀큰 이전의 신용평가 체제와 같은 허점이 많은 신용등급 제도가 그들에게는 금광으로 보였던 것이다.

저신용자들이 사금융을 이용하는 이유

국내 경제활동 인구의 41%는 신용등급 7등급 이하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다. 전 인구의 41%가 대출을 받으려 해도 받을 수 없는 상황. 언론에서는 사금융을 이용하다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람들을 도박꾼 혹은 과소비 인구로 묘사하지만 실상은 그와 다르다. 사금융을 이용하는 주 이유는 실직 후 필요한 병원비, 교육비, 생활비가 65%로 집계되었다. 드라마나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것과 달리 41%의 저신용자들에게는 돈이 필요할 때 찾아갈 곳은 사금융밖에 없는 것이다.

사금융 이용자, 89%가 2년 내 신용불량자

통계에 따르면 한 번 사금융을 이용한 이는 89%의 확률로 2년 내 신용불량자로 추락한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에 진출하는 외국계 대부업체가 늘어날수록 경쟁이 심화되어 이자율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적정 수준으로 안정화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처럼 낙관적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다.

사금융 이용자, 89%가 2년 내 신용불량자

사금융 이용자, 89%가 2년 내 신용불량자

신용등급의 한계로 대부업체를 찾게 된 이들은 높은 이자율 때문에 점차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간다. 그리고 대부업체는 연체율 등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그 정도의 이자를 받지 못하면 적자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며 상한금리 축소에 반대한다. 과연 그럴까?

발상의 전환, 대안금융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여 빈곤퇴치에 앞장선 공로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여 빈곤퇴치에 앞장선 공로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무함마드 유누스

1976년, 방글라데시는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 이상으로 대부업에 의한 폐해가 심각했다. 서민들은 어떻게든 돈을 빌려야 했지만 제도권 은행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대부업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부업자들은 피해를 상쇄하기 위해 이자율을 높이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때 이러한 과정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이가 있었다. 치타공 대학의 교수였던 ‘무함마드 유누스’였다.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

‘사람들이 신용등급이 낮아서 돈을 못 갚는 게 아니라 애초에 이자율이 높아서 못 갚는 게 아닐까?’

그라민 은행

그라민 은행

그는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거대한 실험을 계획한다. 이른바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Grameen BankProject)’. 그라민이란, 방글라데시어로 ‘시골’ 혹은 ‘마을’을 뜻하는 말이다. 신용도가 높았던 유누스 교수는 저리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자신의 돈을 150달러 같은 소액으로 나눠 빈민들에게 담보 없이 저리로 대출해 주었다.

유누스 교수, 2006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

만약 기존의 신용등급 체제가 옳았다면 상환율은 상당히 낮게 나올 것이고 유누스 교수는 손해를 입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현재의 신용등급 자체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걸 증명해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노벨상을 만든 노벨

노벨상을 만든 노벨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환률은 99%에 달했다. 유누스 교수는 계속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흑자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대출을 받은 600만 명의 빈민 중 58%는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이클 밀큰이 기업의 채권 평가에 의심을 품고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면 유누스 교수는 개인신용평가 산정에 있어 틈새를 발견한 것이다. 유누스 교수의 프로젝트는 전 세계 37개국으로 확대되었고 그 공헌으로 2006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피상적인 개인신용평가에 따른 악순환

우리나라는 아직도 피상적인 개인신용평가에 따른 악순환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주택담보 대출의 금리를 올렸다 다수의 불량채권이 양산되어 금융시장 자체를 붕괴시킬 뻔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목격했음에도, 제3세계의 마이크로 크레딧을 목격하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금융 위기가 시작되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금융 위기가 시작되었다.

서민일수록 회수율이 낮을 것으로 예측되기에 이를 상쇄하기 위해 이자율을 높이고, 이자율이 높기에 회수율은 다시 낮아지는 악순환. 정부에서는 미소 금융 등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지만 2009년 5조 2천억의 등록대부업 대출을 7천억의 기금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애초부터 무리로 보인다.

물론 새로운 시도는 조금씩 보이고 있다. 숫자로 이루어진 신용도만이 아니라 대출을 받으려는 이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상환 목표를 게시글로 올린 후 투자자와 연결해 주는 소위 P2P 금융도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다. 각 지역 단체나 장학 재단 등에서도 자발적으로 현재의 악순환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현실의 모순과 균열을 발견하고 대안 모델을 만들어야

마이클 밀큰이나 무하마드 유누스의 사례를 살펴본다면 혁신은 자선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니다. 현실의 모순과 균열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대안 모델을 만드는 것은 기업에게도 소비자에게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회 맥락에도 상상 이상의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현실의 모순과 균열을 발견하고 대안 모델을 만들어야

밀큰이 사욕을 위해 고심하다 정크 본드를 재발견해 미국의 경제 전환에 공헌한 것처럼, 무하마드 유누스가 경제학적 의문에 따른 실험으로 전 세계 빈민들의 자활에 큰 공헌을 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고민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용 - 어떻게 신용불량자가 되는가 (사물의 민낯, 2012. 4. 16., 애플북스)


돈을 빌려주는 금융회사들은 돈을 빌리는 사람의 신용정도를 먼저 조사하게 된다. 신용이 좋은 사람에게는 돈을 잘 빌려주고 낮은 금리를 적용한다. 그러나 신용도가 낮거나 신용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높은 금리를 적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대출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 신용이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금융시장에서는 채무를 제때에 갚을 수 있는 능력이나 직접 채무를 얻는 행위를 말한다.

신용대출을 받을 때 대출금액이나 금리를 결정하는 요인은 개인의 신용등급, 소득의 크기 그리고 직업의 안정성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신용등급이 좋을수록 대출 가능한 금액도 커지고 금리도 낮아진다.

모든 금융회사들이 대출이나 신용카드를 발급할 때 개인의 신용등급을 활용하고 있는데 신용이 좋은 사람과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 적용되는 금리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 즉, 담보대출의 경우에도 신용도에 따라 적용금리가 달라진다.

신용등급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대출정보, 보증정보, 카드사용정보, 연체정보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용이란? (대학생을 위한 실용 금융, 금융감독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용

 ]
유형개념용어

정의

채권·채무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인간관계.

개념

신용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을 신뢰 또는 신임한다는 뜻으로 사회생활에 있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이어주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경제용어로서의 신용은 이와같은 주관적·심리적 의미보다는 객관적인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를 가리키며, 이때 주관적·심리적 요소는 부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즉 경제용어로서의 신용은 단적으로 말해서 채권·채무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가리킨다.

상품이나 물품을 매매, 거래함에 있어서 그 대가를 뒷날 지급한다거나 또는 금전을 대차하는 따위의 인간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용은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이 발생하고 발달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급속히 확대되어 자본주의의 중요한 구성요소를 이루게 된다.

신용의 종류와 기능

신용을 간단히 말해서 채권·채무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때, 채권·채무관계에는 일정한 경제행위의 결과로써 생기는 것과 바로 경제행위의 대상으로 전화()되어 있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이와 같은 신용의 주요한 주체로서는 계()·보()·객주()·여각() 등이 있었고, 경제행위의 대상으로 전화된 것으로는 어음이 있었다.

경제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신용은 거래로서의 신용이며, 고용계약이나 물품의 매매에 있어 그 값을 뒷날에 지불할 것을 약속하는 지불신용과 금전의 대차거래인 대차적 신용이 있다. 원래 이런 신용은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서부터 비롯되어 상업신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신용제도에 있어서 2대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상업신용과 은행신용인데, 은행신용이란 금융업자가 행하는 대출거래를 말한다. 이와 같은 신용은 첫째, 유통제비용()의 주요내용이 되는 화폐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절약하는 기능을 행한다.

이를테면, 거래의 대부분이 신용거래로 되면 신용화폐로서의 지폐가 금속본위제도 아래에 있어서도 금속화폐 대신 유통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채권·채무의 상계()에 의하여 결재가 이루어져서 화폐는 필요없게 된다. 또한, 신용을 통해서 통화의 유통속도가 빨라지고 유통에 필요한 통화량은 그만큼 줄어든다.

거기다가 상업신용이 행하여지고 은행신용이 성립되면 구매 또는 지불을 위한 준비금이나 적립금 등 각종의 보장()화폐형태의 자본이 그만큼 불필요하게 된다. 둘째, 신용은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는 거래를 성립시키는 동시에, 그 거래를 담당하고 있는 개별기업이 절약된 자본을 생산확대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용의 이러한 사회화과정이 개별 기업적으로 이용되면, 투기가 끼어들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셋째, 신용은 상품유통의 속도에 따라서 자본의 회전을 증진시킴과 아울러 자본의 재생산과정을 촉진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구매행위와 판매행위를 장기에 걸쳐 분리시킴으로써 여기에 투기가 끼어들 여지가 생기게 된다.

또한, 호황기에는 신용투기가 성행하게 되고 그것이 과잉생산의 한 계기를 이루기도 한다. 넷째,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아래서는 자본의 경쟁이 끊임없이 행하여져 자본이 이동하고 자본이 사회적으로 분배되는 동시에 자본의 일반적 이윤율이 균등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신용, 특히 은행신용은 이러한 과정을 매개하고 실현시킨다.

산업자본은 제각기 그 운동중에 생기는 자금을 은행신용을 통하여 서로 사회적으로 융통하면서 생산을 반복하는 것이다. 다섯째, 신용의 발전에 의거하여 주식회사의 형태를 가지는 기업형태가 성립된다. 자본주의적 신용제도 아래에서는 산업자본의 운동중에 생기는 유휴자금이 은행에 집중되어 대부자본이 되고 은행신용을 통하여 자금을 조달한 산업자본가는 이에 대하여 이자를 지불하게 된다.

자본이윤은 이자와 기업이득으로 분할되므로 그 결과 산업자본가는 자기의 자본이윤 중 일부를 그 자본 자신이 낳는 이자로, 다른 일부를 자기의 기업활동에 대한 보수로서의 기업이득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뒤에 대부자본가와 기업자본가와의 분리, 대립의 경향을 가져오게 되고, 거기에 이른바 자본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 같은 경향을 가장 단적으로 구체화시킨 것이 주식회사이다. 한편, 경제행위의 대상으로 전화한 내용은 유통수단의 대용으로서의 신용을 말한다. 이것은 신용화폐로서 화폐적 신용이라고 한다. 전근대적 사회의 이 같은 신용형태로서는 어음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특히 다음과 같은 경우에 발행되어 쓰였다.

첫째, 남에게 채무를 지는 경우 차용증서 대신에 어음표에 지불기한을 명시하여 채권자에게 교부하는 오늘날의 약속어음과 같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둘째, 어떤 상품이나 물품을 매매, 거래함에 있어 그 대가를 뒷날에 지불할 것을 약속하는 어음을 작성하여 교부한 것이니 약속어음 혹은 수표의 의미로 발행된 것이다.

셋째, 어떠한 상점이나 또는 신용있는 사람에게 미리 금전을 맡겨두고 근대의 은행에서와 같이 필요할 때에 수시로 어음표를 작성하여 발행하면 기금을 맡아가지고 있는 상점이나 사람은 곧 지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일람불()어음이나 수표의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넷째,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금전거래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미리 서로 약속을 하고 그 약속된 범위 안에서 어음환표()를 발행하거나, 또는 이 지방에서 저 지방으로 가는 금전을 이 지방에서 자기가 당겨쓰고 어음표를 작성하여 보내면 저 지방사람이 지불하여주는 방법이다. 이것을 옛날에는 환()이라 불렀다.

다섯째, 어음은 옛날에도 양도가 이루어졌으나 다만 기명식과 무기명식을 막론하고 이서()라는 요식행위의 관습이 없었다. 또한, 어음양도에는 채무자의 승낙을 받을 필요는 없었으나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이것을 답음()이라 하였다. 답음의 증거로 어음의 여백이나 이면에 채무자의 수결() 혹은 답인()을 받아두었다.

또한, 어음기한이 도래하기 전에 돈이 소용되면 어음을 전당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어음을 미리 발행하여 매매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화폐적 신용은 근대사회에 들어와 상업화폐와 은행화폐의 두 가지 형태로 발전하였다.

상업신용에 근거하여 발생한 채권·채무관계가 유통수단으로 직접 쓰이는 것이 상업화폐인데, 실제로는 상업신용의 증서인 상업어음이 유통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다. 은행화폐에는 태환은행권()과 예금화폐가 있다.

태환은행권은 금본위제도 아래서 일정분량의 금화폐를 지불할 것을 약속한 은행의 채무이며, 예금화폐는 은행이 예금자에게 지고 있는 기탁거래상의 채무가 유통수단으로 전화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는 고도의 신용경제사회로서 현금의 필요없이 신용카드에 의하여 모든 거래가 간편하고 손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전근대의 신용

우리나라 신용의 발달과정을 고찰함에 있어서는 1905년(광무 9)의 재정·화폐·금융부문에 대한 개혁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을 전근대적 신용, 그 이후를 근대적 신용으로 구분하여 고찰하는 것이 적절하다. 일제의 대장성주세국장()이었던 메카다()는 재정고문으로 한국에 부임하자 곧 식민지화의 준비공작을 위한 주요경제작업으로서 재정·화폐 및 금융부문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에 따라 1905년 9월 『약속어음조례』 및 『어음조합조례』를 발포하여 어음의 형식의무를 규정함과 동시에 어음조합의 조직에 의한 어음보증을 시행하게 함으로써 재래의 어음제도를 폐지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이에 따라 1906년 1월에 한성어음조합이 업무를 개시하였으며 그 뒤 평양·대구·진주·전주·광주·진남포·수원 등지에서도 조합의 성립을 보게 되어 재래의 어음표는 과거의 유물로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전근대사회에서 주요한 신용주체로서의 구실을 한 객주는 일제강점기에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고, 계는 오늘날에도 잔존하고 있으나 과거와 같은 성격의 것은 아니다.

1. 고려시대의 신용

우리나라의 시장()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삼한시대부터이다. 이때에 서()·속()·맥()·두()·도() 등의 오곡이 생산되고 더욱 식상()·재면() 및 이것들을 원료로 하는 방적()이 널리 행하여졌고 국내에 있는 많은 시장에서는 철()을 화폐로 한 매매교환이 성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시장은 사회경제의 발달에 따라 삼한시대의 시장보다 훨씬 발달되었고, 또한 시장에 대한 정책도 행하여지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시장은 신라의 삼경시() 외에 426개의 주·읍·시 및 가로시() 등이 있어서 더욱 활발한 매매교환이 행하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919년(태조 2)에 일반 국도()에 관한 시설과 함께 시장정책을 세워서 먼저 시전(), 즉 상가를 세우고 이를 구획하여 방()이라 하고 상인이 거주하는 지구로 정하였으며, 또한 이()를 두어서 일반백성이 거주하는 지구로 정하였다. 지방에는 목()·부()·군()·현()·진()을 두어 여기에 대관()을 배치하고 대관의 소재지에는 성보()를 축조하여 외적에 대한 방어 및 피난의 장소로 함과 동시에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삼았다.

고려조에 있어서의 이러한 행정구획은 513개였으므로 당시의 성읍시장()은 적어도 500개 이상이 되었을 것이며, 이밖에 교통의 요지, 화물의 집산지 등에 촌락시()가 있었고 이러한 향시()를 떠도는 행상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시장에서 매매교환의 도구로 사용된 화폐는 시대에 따라 다르나 혹은 철전()·전곡()·은기폐()·면폐()·견폐()·저화()·추포폐() 등이었다.

시장의 성립으로 신용에 의한 매매거래가 일찍부터 이루어졌으며 시장의 발달과 함께 더욱 성행, 발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신용대출에 관한 조직적인 기구로 보()를 들 수 있다. ≪고려사절요≫에서 “보는 전곡을 시납()하여 본()은 그대로 두고 이식()을 취하여 영구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므로 보라고 한다.”고 하였다.

보의 본래적 기능은 이자로써 구빈()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공적 경비에 충당하는 것인데 963년(광종 14)에 제위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문종 때에 팔관보()가 설치되었다.

모두 국가기관으로 관리를 두고 관리시켰으며 보에 시납된 미곡을 민간에 신용으로 대출하고 그 이식으로 각종 구제나 경비에 충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보의 본래 기능은 차츰 변질되어 각 궁원고()·상평창()·의창()·주창() 등과 함께 실제에 있어서는 공사()의 고리대기관으로 전락하였다.

2. 조선시대의 신용

조선시대의 신용을 고찰할 때 먼저 일반사회에 깊이 침투, 보급되어 있었던 계를 생각할 수 있다. 계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특유의 제도라고 하는데 원래 사교 및 종교적 회합에서 비롯된 것이 차츰 시대의 요구와 사회의 사정에 따라 그 내용에 신축성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계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단결하여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일정한 규약을 설정하고 서로 화폐 또는 현물을 갹출하여 여러 가지 사업을 행하는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인보공조()의 이념과 ‘믿음’의 세계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목적을 가진 하나의 조합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계는 고려 말기 호포()의 부담에 응하기 위하여 서민이 조직한 것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 말기까지 군포계()라는 납세단체로서 지속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생산력이 약한 상공업자들이 관부에 납입할 진상품이나 공물을 준비하기 위하여 각종의 계를 조직하고 그것이 뒤에는 동업자의 조합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공물계()가 다수 조직되었음이 비변사 편찬의 ≪공폐 ≫나 ≪육전조례 ≫ 등에 나타나 있다.

납세 공물을 위한 자치단체로서 발달하여온 계가 보험의 성질을 갖추게 됨에 따라 공공사업의 경영, 식산흥업, 상호부조 혹은 저축금융 등의 목적에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 각종의 계가 성행한 것은 관치행정()의 불비를 보완하기 위한 백성들의 자치적 활동의 결과일 것이며 국민의 경제력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특히 상호부조와 협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더욱 유교사상이 보급되었던 조선사회에서는 신의와 약속의 관념이 일반화되어 이것이 계의 발달을 조장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의 종류는 그 목적에 따라 다양하나 여기에서는 경제문제와 신용과 관련된 관점에서 다음 몇 가지만을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상호부조와 재해보험의 목적을 가진 계로서 사회규범상 중요시하였던 관혼상제에 관한 계가 가관계()·호신계()·향사계() 등 그 수도 가장 많고 일종의 상호보험 또는 공제조합의 성질을 띤 것이었다. 둘째, 산업적 목적에서 조직된 것으로 오늘날의 생산조합·구매소비조합과 비슷한 것이었다.

예컨대 촌락주민의 노전을 공동수익의 목적으로 공동 경영하는 일종의 촌락공유체인 노전계(), 공유산()의 양송() 목적인 송계(), 목공의 상호친목과 작업부담의 목적인 대목계(), 농민의 상호친목과 제초() 및 기타 작업부담인 두레계와 사계()·우계()·어망계() 등이 그것이다. 셋째, 자금융통의 목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오늘날의 공제조합·신용조합과 비슷한 것이 있다.

예컨대 계원의 출연금으로 대부()·이식()을 행하는 월수계(), 상인간의 친목과 자금융통이 목적인 상무계(), 자금융통의 산통계(), 계원의 출연금을 대부하는 증식목적인 창신계()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계는 대체로 30인 전후의 계원으로 조직되나 큰 것은 수백 인의 경우도 있다. 계전()의 이용방법은 계원에 한하는 경우와 계원 외에도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

계전의 융자는 대인신용()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데 상당한 고리인 경우도 있었다. 이 같은 계는 조선시대에 전국 모든 지역에 널리 보급되고 일반서민의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의 각 방면에 걸쳐 극히 유용한 구실을 하였다. 더러 문제점과 결함이 지적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신용사회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조선시대의 시장상인에는 경()에 시전인, 지방에는 보부상·여각·객주·주막 등이 있었다. 길이 험악하고 교통과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행상이 발달하게 마련인데, 특히 토적()이 들끓고 통치질서의 문란으로 인한 가렴주구로 말미암아 보부상인들은 자구책으로 강력한 단체를 조직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행상조합인 보부상회()로서 전국적으로 공고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엄격한 불문율을 가지고 이 규율에 위반하여 부정불의를 행하고 허위거래를 하는 사람에게는 만좌중에서 혹독한 제재를 가하였으며, 또한 상하의 예의가 바르고 동료간의 약속을 엄히 지켰으며 상호부조의 기풍이 강하여 신의와 신용을 본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보부상의 중심세력을 이룬 것은 개성의 상인이었다. 고려가 멸망하자 전조의 신하들은 조선조에의 출사를 꺼려 생계의 수단으로 당시 천업시하던 상업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팔도에 흩어져 행상을 하게 되고 뒤에 개성상인의 명성을 얻어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개성상인은 검소 근면하며 상기()를 잡는 데 예민하고 단결력이 강하며 놀라울 정도로 신용제도가 발달되어 있었다.

더욱 금융에 있어서는 중국의 산서표장(西)에도 뒤지지 않는 활동을 하고 있어 시변()이라는 독특한 매출방법을 행하였는데 그 대출고()는 은행이나 금융조합을 능가하였고, 또한 그들이 창출한 차인제도()·사개부기(簿)·어험() 등은 유명하다. 개성상인의 보부상으로서 활동하는 행상인은 전국을 순회하여, 그 수는 2,000∼3,000인에서 많을 때는 1만인 이상이 되었다.

그들은 상당한 자본을 가지고 화물을 보에 싸고 또는 말등에 얹어 운반하였다. 이 중에는 자기의 계산으로 독립 영업하는 자와 차인()이라 하여 주인으로부터 신용으로 상품 또는 자본을 공급받아 상품을 판매하고 나아가서 금융을 하는 자도 있었다. 또한, 보부상은 현금거래뿐만 아니라 신용거래도 하고 고리대금도 하였다.

지방행상을 활발히 한 개성상인은 일찍이 시장금융의 유리한 것에 착안하여 전국도처에 출입하면서 금융상의 활동을 하였다. 돈을 빌리는 사람은 주로 시장에 출입하는 소상인이었으나 그 중에는 지방의 농가도 있었다. 시장대출은 무담보의 신용대출이었으며 따라서 금리는 고율이었다.

시장금융의 방법이나 명칭도 지방에 따라 구구하여 일변()·월변·연변·시전()·체계() 등 여러가지였으나 대체로 장날에서 다음 장날까지를 1기간으로 이율을 정하였다. 상업이 발달한 개성은 또한 사개부기도 저명하여 그 양식은 서양부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색을 지녔고, 기장의 방법은 당시의 경제사회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 부기의 발명은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을 뿐 정확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서양부기의 발명보다 앞선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사개치부법(簿)이라고도 칭하며, 부기의 조직이 봉차( : 자산)를 1개(), 급차( : 부채)를 1개, 이익을 1개, 손실을 1개, 합쳐서 4개가 되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사개부기에 속하는 장부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 일부를 표시하면 외상판매를 기입하는 것을 외상장책(), 외상매입을 기입하는 것을 타급장책()이라 하였고 혹은 상책()·하책이라 하여 상책에는 현금판매를 적고, 하책에는 외상판매를 기입하였다. 각종의 장부를 정리하여보면 대체로 주요부와 보조부로 나누어진다.

주요부에는 일기장()·분개장()·봉차장(자산장)·급차장(부채장)·원장()·외상장책·타급장책·결산장 등이 있다. 보조부에는 현금출납장·물품거래장·위탁물처리장·어험수지장()·회계책·손익계산장 등이 있다. 이와같은 부기의 발달, 장부의 정리상황은 상품에 대한 신용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신용제도가 상당한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음을 증명하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장부에 기입하는 특용문자()나 부호 등에서도 알 수 있다. 가령 상()과 하()의 두자는 현금출납에 한하여 사용한 것으로, 현금이 나갔을 때에는 그 행()의 말단에 ‘하’자를 기입하고 현금이 들어왔을 때에는 ‘상’자를 기입한다. 직전(), 즉 현금으로 판 것을 ‘직방()’이라 기입하고 현금으로 사들인 것을 ‘매득()’이라 기입한다.

△는 타급장부나 외상장부 중 수지의 관계가 소멸되었을 때에 사용한다는 등이다. 어쨌든 전성기를 맞이한 조선시대의 보부상이 놀라울 정도의 단결력과 조직력을 가지고 상행위와 금융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양반의 후예를 중심으로 한 개성상인이 그 중심세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경시()에 있어서의 육의전()은 유럽의 중세 도시에서 널리 행하여진 상인조합이나 동업조합에, 그리고 향시에 있어서의 보부상은 중세 혹은 그 이전의 대상() 또는 상인조합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객주 및 여각은 모든 국가에 있어 인정되고 있는 보편적 상사제도()의 하나로 가령 중국의 행기(), 일본의 돈야(), 영국과 미국의 팩터(factor), 독일의 코미쇼네르(Kommissiona"r)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업무의 내용을 보면 다른 나라의 제도는 다만 위탁매매의 업무에 한정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위탁매매 외에 금융·숙박·도매()·중개·운송·기탁 등 실로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업무에 종사하고 있어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객주와 여각과의 구분에 관해서는 대체로 객주가 취급하는 화물의 품목에 별다른 제한이 없으나 여각은 주로 해산물이나 곡물 등 용적 중량이 커서 취급하기가 곤란한 화물에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객주는 화물을 수용할 특별한 설비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으나, 여각에는 이러한 설비로서 대개 창고가 있고 점포도 넓으며 마방()을 설치하여 화물을 운반하여온 우마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객주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항해술이 발달하고 대외무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① 물산객주() : 객주의 원형이며 위탁매매가 주요업무이다. 객주가 행하는 화물의 매매는 보통 거간()이라는 중개인을 두고 하게 된다.

또한, 부수적 업무로서 타지에서 온 위탁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여주고 또는 하주()나 매주()를 위하여 대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 대부금에는 물품의 판매위탁자에 대한 가급금(), 물품의 위탁판매를 조건으로 그 물품의 수집을 위한 선급금(), 물품의 매수를 위한 선대금()이 있고 때로는 예금업무를 겸하기도 하였다.

그 예금에는 하주가 위탁한 물품을 매각하고 그 돈을 객주에게 이자를 붙여 예금하는 경우, 외획제도()에 의한 국고의 일시예금 등이 있다. 또한, 어음의 발행·할인·인수 등의 업무도 하였으며 오늘날의 은행과 같은 금융업무도 담당하였다. 객주는 단지 영업상의 사항에 한하지 않고 위탁자의 신상문제까지 뒤를 돌보아주었으며 양자 사이의 신뢰관계는 한 대()에 그치지 않고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객주와 위탁자의 업무 내지 신뢰관계는 물산객주 이외의 유형의 객주에 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변함이 없다. 다만 유형에 따라 객주의 업무내용 및 범위가 달라진다. ② 여각 : 주로 한강연안의 각 포에서 곡물·소금·어류, 기타의 해산물을 다루었으며 큰 창고와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널리 상거래를 하는 대상인이었다.

③ 보상객주() : 보상을 상대로 하는 객주이며 취급품목은 금·은·동·포·면·능()·지물·인삼·피혁·잡화 등으로 부상()이 다루는 품목과 혼동되지 않도록 법령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부상은 부피가 크고 무거우며 비교적 싼 물품, 예를 들면 생선·소금·수철()·토기·목물() 등을 지게에 지고 행상하는 것으로 보상과 부상이 다루는 상품의 차이는 마치 객주와 여각의 차이와 비슷하였으므로 보상은 객주와, 부상은 여각과 친교를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보상이 다루는 품목 중에는 각 지방의 특산물이 많았으므로 특정의 상품에 대한 전문화로 그 유대는 3, 4대에 걸쳐 계속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예를 들면 충청도 서천·한산의 저포(), 전라도 구례·곡성의 마포(), 나주·남평()의 목면(綿) 등과 같이 각 지방의 특산물과 거래관계가 있는 보상과 객주는 깊은 신뢰를 가지고 굳게 맺어지게 되고 이것이 바로 보상객주의 유래이며 객주 중에서도 가장 신탁적()이고 독점적인 기능을 가진 전형적인 객주라고 할 수 있다. ④ 무시객주() : 언제든지 사용하는 가정일용품을 다루는 객주를 뜻한다.

또한, 주로 부상의 물품을 다룬다는 점에서 부상객주라고도 할 수 있다. ⑤ 만상객주() : 청선객주()라고도 하며 중국상인을 상대로 하는 객주를 말한다. 만상이란 의주만()의 상인이라는 뜻으로 한국의 서북단에 위치하는 의주만은 중국과의 상거래가 행하여지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국내에 유통하는 많은 중국상품은 주로 만상객주의 손을 거쳐 수입된 것이다. 명청조()가 들어서자 중국과의 교통이 크게 열려 한국의 여러 항구에도 중국의 선박이 출입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중국 선박과의 거래를 담당한 객주를 청선객주라 하고 이들에 대해서만 특허를 주고 소정의 구문세()를 국가에 납입하도록 하였다.

⑥ 환전객주():금융업을 전문으로 하는 객주로서 대금업자 내지 금융기관에 해당하는 것이다. ⑦ 보행객주() : 숙박업이 본업인 객주이다. 일반의 객주는 위탁자인 하주에 대해서만 숙식을 제공하나 보행객주는 그러한 제한이 없다. 숙박업소로서 보행객주 외에 주막이 있으며 이것은 중류 이하의 객을 상대로 한다.

⑧ 경주인() : 지방의 관리를 위하여 중앙과 지방과의 연락·여숙(宿) 및 기타 여러가지 중개를 하는 여각주인, 즉 광의의 객주이다. 경주인은 위탁자가 관리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향리(), 즉 지방의 관리이며 또한 그 업무는 위탁자를 위해서 행하는 사적 업무는 물론, 국가를 위해서 납세의 대행 등 공적 업무까지를 중개하는 광범한 일에 종사하였다.

⑨ 원() : 행상들의 숙박소이다. 문헌에 따르면 국가의 기관으로서 역과 원을 두고 역을 군사상·정치상의 명령전달의 사명을 담당시키고, 원은 산업상·교역상의 편의제공의 사명을 수행시키기 위한 상려(), 즉 행상인을 숙박시킨 것이다. 원의 업무가 보행객주 및 일반의 객주와 상통하면서도 그것이 공적인 기관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객주는 어음의 발행·할인·인수 등을 한다고 위에서 기술하였거니와, 어음은 우리의 화폐경제사회의 신용제도사상 가장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우리의 미덕인 신용을 권장하는 가장 간편한 표권()이었다. 어음은 닥[]을 원료로 한 간지()·장간()·창호지·백지 등을 임의로 사용하되 대략 길이 4치5푼에 너비 1치5푼 가량으로 자른 종이쪽에 지불할 금액을 한복판에 쓰고 도장을 찍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이 저지() 사용법의 제도는 저화() 또는 저폐()에서 기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저폐 사용은 고려말 공양왕 때이며 조선 태종 때에 이르러 널리 쓰여져 현종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저폐는 송나라의 교자()와 회자(), 그리고 금·원나라 이후의 교초보()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말에 중국의 이 초저폐()가 수입, 통용된 바 있어 이 초법()에서 저폐법이 나오게 된 것이 분명하다.

원래 송나라의 교자는 촉()의 철전()이 무거워서 무역통상에 불편하므로 이 교법()을 행하여 일교()로 한 꿰미에 해당시키는 이른바 일민당용()으로 사용하였고 이것이 뒤에 초로 변하여 고려에 들어와 유용된 일이 있어 결국 저화의 발생을 보았던 것이다. 이 종이쪽에다가 금전의 신수()를 두어 통용하는 저화가 조선 태종 때에 성행하였으니 어음법은 그 뒤에 발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정신은 초의 제도에서와 같이 무역통상에 중전() 운반이 불편하므로 그 편의를 도모하고자 나온 것이며 이것을 처음 발행하기 시작한 곳은 서울의 육의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어음은 주인, 즉 평양주인이니 원산주인이니 하는 곳과 물산객주에게서 사용되다가 마침내는 나라의 호조와 일반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된 것이다.

어음표 대조를 살펴보면 어음표의 중간을 둘로 쪼개어 오른쪽은 남표() 또는 웅편()·웅표()라 하여 받는 편에서 가지고, 왼쪽은 여표() 또는 자편()·자표()라 하여 주는 편이 가진다. 사기표()도 마찬가지로 사기접시나 기왓장 같은 것을 둘로 쪼개어 나누어 가지고 기한이 되어 양쪽을 맞추어보아 꼭 맞으면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박하고 간편한 어음이 수백년간을 통하여 별착오 없이 널리 사용되어온 것은 우리의 경제윤리와 도덕생활의 일면을 여실히 말하여주는 미풍양속이라 하겠다.

한말 이후의 신용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메카다는 한국의 재정고문으로 취임하자 곧 재정·화폐부문과 금융부문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고 식민지경제정책의 중심기관인 중앙은행을 설립하였다. 그는 이어서 부동산금융기관과 급격히 몰락하여가는 농민층에 대한 특수금융기관을 설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동화() 회수로 인하여 우리나라 상인들 사이에 금융공황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1905년 9월 『약속어음조례』 및 『어음조합조례』를 발포하였다. 이로써 어음의 형식의무를 규정함과 동시에 어음조합의 조직에 의한 어음보증을 시행하게 하여 전통적인 재래의 어음제도를 폐지시켰다.

또한, 1905년 9월 『공동창고장정 』을 발포하여 15만원()의 대출자금으로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게 하여 화물의 기탁을 인수하고 이에 대한 보관증권을 발행하고 주로 상품담보대출을 하는 한편 상업어음의 할인 및 부동산담보대출도 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06년 3월 『은행조례』를 공포하여 모든 증권할인업무·환업무 및 예금대출업무를 하고 있는 업체를 전부 은행으로 간주하여 모두 인가제로 규제하는 등 우리나라 은행에 대한 탁지부()의 감독권을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농공은행조례 』를 발포하여 외획제도()에 대신하는 새로운 지방금융기관을 전국 11개소에 설치하고 부동산금융 및 장기금융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07년 5월 지방금융조합규칙을 제정하여 각지에 지방금융조합을 설립함으로써 지방 소도시의 상공업과 농촌에 대한 일제의 경제적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강점기에 더욱 정비, 강화되었으며, 이와같은 일련의 제도적 장치 및 그 강화에 의해서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신용제도는 금지 또는 위축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가령 객주는 1930년대까지 존속되었다고는 하나 그 실체에 있어서는 과거와 같은 면모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광복 후의 신용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독자적으로 경제를 운용할 수 있게 되어 1950년 5월 13일 『한국은행법시행령』이 제정, 공포되고 1950년 6월 6일 금융행정의 최고기관으로서 금융통화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의 결정으로 한국은행정관이 작성되어 전액 정부출자에 의한 자본금출자가 행하여져 1950년 6월 12일부터 우리나라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이 그 업무를 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발족한 지 꼭 2주일 되는 날 6·25동란이 발발하여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1962년 이래로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여 1960년대 및 1970년대에 고도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룩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흥공업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사회·경제·문화의 모든 면에서 근대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어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대립, 충돌하기도 하였고, 나아가서는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주의·불신풍조 등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미풍양속의 전통적인 것을 되찾고 신의와 신뢰에 바탕을 둔 경제윤리, 도덕적 생활확립의 소리가 높아졌으며, 이와 아울러 신용의 현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즉, 신용카드에 의한 매매거래 기타 업무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신용카드업은 은행제카드로 국책은행이 부수업무로 하고 있는 국민비자카드·은행신용카드(BC)·판매점카드 등 3종과 외국계카드로 아멕스(AMEX)·다이너스클럽카드 등 2종, 전문회사카드로 코리언익스프레스·세종카드 등 2종이 있고, 판매점카드로는 신세계·미도파·롯데 등 주요백화점카드 등이 발행되었으며, 가입회원은 약 240만명에 이르렀다.

더욱이 정부는 1987년 『신용카드업법』을 새로 만들어 신용카드업의 건전한 육성과 소비자금융의 활성화를 뒷받침해주었다. 신용카드회사의 업무영역을 대폭 확대하고 법제화시켜 카드회원에 대한 지급보증 및 자금의 융통, 여행알선, 보험대리, 물품 및 용역의 할부 또는 외상구매를 위한 지급보증업무 등을 하도록 함으로써 회원들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친 신용생활의 편의가 극대화되었다.

오늘날 많은 국민들이 2, 3개의 신용카드를 이용하고 있을 정도로 신용생활이 일반화되고 있다. 국내외에 있어서의 이 같은 신용카드의 활용은 대금결재수단의 간편화와 생활의 편리화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사치, 낭비를 유혹하고 더욱 가맹점과 짠 전문카드 위조단이 빼낸 고객정보로 카드를 위조해 물건을 사거나 현금서비스를 받는 사례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가령 비씨카드는 최근 위조카드가 일본 국철(JR)승차권 구매에 이용된 것이 확인되고 물품구입 액수가 지나치게 많았던 카드 4,200여장에 대해 일단 사용정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한 은행계의 카드사는 1997년 6월 태국에서 100여건 약 6만 달러 규모의 현금인출이 위조카드에 의한 것임을 적발하고 회원들을 상대로 일일이 카드 분실, 또는 비밀번호 유출 여부를 조사한 바 있다.

신용생활의 선진화와 일반화는 이것을 악용하여 신용유통의 질서를 교란하고, 한편 사치 향락의 풍조를 조장하는 일면을 간과할 수 없다. 신용카드악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회원 각자의 주의, 그리고 절제있는 신용생활의 확립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하겠다.

생활과 신용

신용은 생활을 지탱해주는 근간이 된다. 이와같은 신용을 구체적으로 구현하여주고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해준 것이 계였다. 계는 거의 모든 마을에 동계()·이중계()가 조직되고 그밖에 각양각색의 계가 조직되어 그 목적에 따라 영위한다. 따라서 계를 무시하고서는 한국인의 생활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성행한 계는 조선 정교()의 기본인 유교를 신조로 하고, 목민()의 방편으로 삼았던 향약을 기초로 하여 발전된 것이다. 향약은 송나라 여남전()의 향약 4대강령에 기원하여 100년 뒤 주희()의 보정()을 거쳐 한국에 계승된 것으로 이황()·이이()와 같은 거유에 의해서 여씨향약()을 수정하여 지방에 행하게 된 것이다.

향약은 유교적 덕육()을 이념으로 하고 환난상휼()하는 공제적 기능을 주목적으로 한 것이다. 고을 또는 마을을 단위로 향약을 조직하고 혼상()에 상호부조하며 공동출곡()한 사창()의 곡식을 가난한 사람에게 대여하고 수확 뒤 원본이식()을 취한 것이다. 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러한 정신은 향약에 의하여 유교적 상호구제로 심화되고 사창에 의해 공동저축으로 구제방법을 창출하였다.

이러한 유교적 도덕관에 바탕을 둔 신용의 생활화는 어음의 사용으로 구체화되었다. 우선 호조의 어음 사용례를 보면 어느 고을의 세전()이 감영()을 거쳐 호조로 상납된다면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라 어음이 사용된다. 가령 고을에서 곡식 1만석의 조세를 받아 감영에 상납할 때 이 곡식을 상인에게 입찰식으로 팔아 그 작전(: 대금)을 상납할 터인데, 이때 현금수송에 위험이나 불편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개성부()에서 경기감영으로 작전을 보낸다면, 상인이 한성 육의전 가운데 입전에 가서 어음을 발행하여 개성부에 주면 개성부에서는 그 어음을 경기감영에 상납하고 경기감영에서는 지정된 육의전에 가서 현금으로 찾아오거나 또는 육의전 어음표를 받아 호조에 상납한다.

호조에서 경비가 소용되면 호조판서는 호조집리(:지금의 회계담당자)로 하여금 호조역리를 대동하여 어음표를 육의전에 내주고 사기어음쪽을 발행한 것이 있으면 동시에 내어주어 서로 부합되면 현금을 찾아다가 사용한다. 또한 환간()도 사용되었는데, 서간식()으로 하는 것과 어음표를 첨부하여 행하는 서너 가지의 방식이 있었으며, 금전의 지불을 편지로 위탁하는 제도이다.

그 사용례를 보면 평양사람이 서울에 와서 받은 10만냥을 휴대하고 가는 불편을 피하기 위하여 이것을 서울 객주에게 기탁하고 평양의 객주 앞으로 된 환간을 받아 가지고 평양객주로부터 현금을 찾는 것이다.

또는 한성의 육의전 중 백목전인() 갑()이 인천의 포목상인 을()로부터 받을 돈이 5만냥이 있고 동시에 병()에게 지불하여야 할 부채가 있다면 갑은 을을 지불인으로 하는 환간을 작성하여 병에게 교부하고 병은 을로부터 현금을 찾아 쓰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음의 양도도 하고 전당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음이나 환간이 수백년 동안 공사간에 대차·매매, 기타 복잡한 거래에 여러 가지 형태로 주고받고 하였던 것이다.

어음·환간의 본존()인 한성의 육의전의 경우 어음의 결재청산의 양이 대단히 많아서 그리 손쉽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즉 육의전은 수도의 상업경제권과 국가의 재정지배권을 간접으로 장악하고 있었고, 또한 상품전매권을 획득하고 있어서 어음환간의 수수관계가 전국적으로 걸쳐 있어 매우 복잡하였던 것이다.

육의전의 각 전은 적어도 50∼60방() 이상의 도원()들이 장사를 하고 있어 그 많은 여러 방에서 각기 거래, 수수되는 어음은 실로 엄청나게 많았다. 따라서 한 곳에서 그것을 교환, 결재하는 어음교환소를 두었고 그것을 역인청()이라 불렀다. 이에 덧붙여 어음매매가 행하여졌으니 이것은 부자나 대금업자가 어음의 예매()를 행하는 것이다. 가령 대금업자가 10만냥을 가지고 취리()하려고 한다면, 그 돈을 뜻하는 액수대로 나누어 어음을 발행한 뒤 전거간()을 시켜 육의전에 가서 어음을 팔게 한다. 자금이 필요한 전인()은 그 어음을 사게 되나 5일간을 한 파수로 한 어음이면 한 파수의 이자인 변돈만 지불하고 산다. 그 이자 중 거간이 십일제(), 곧 10분의 1의 구전을 받고 그 한 파수가 지나면 또 이자를 지불한다.

그 전인이 현금이 필요하다면 그 전거간을 통하여 샀던 어음을 발행한 대금업자에게 가서 현금지불을 청구하면 된다. 어음을 그대로 사용하든지 현금을 찾아다가 사용하든지간에 이 경우 전인은 자기의 어음을 대금업자에게 발행하여 줌은 물론이다. 이 어음매매에는 반드시 전거간이 왕래하는 것으로 종로 전거간만 수십인이 있었고, 그밖에 문안과 문밖의 전거간은 합하여 수백인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어음은 전근대의 화폐경제시대의 부산물로서 화폐경제를 원활하게 운용함에 있어 그 결함과 불편, 불합리한 것을 잘 조화하고 보조하여준 특수하고 진기하며 간단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신용제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하차은 종이쪽지나 사금파리가 수백년 동안 아무 탈이나 이상 없이 통용되면서 신용을 지켜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지극히 순박하고 신의를 존중하는 우리사회의 미풍양속을 나타내는 것이고 상관습()의 측면에서 보면 절조() 있는 상윤리()의 진화와 경제도덕의 발달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朝鮮貨幣考』(柳子厚, 學藝社, 1940)
  • 『朝鮮の市場』(文定昌, 日本評論社, 1941)
  • 『客主(객주)』(박원선, 연세대학교, 1968)
  • 『한국경제사』(최호진, 박영사, 1970)
  • 『한국금융사연구』(고승제, 일조각, 1970)
  • 「朝鮮契의 社會史的考察」(東岩生, 『東文評論』, 1932)
  • 「朝鮮於音考」(柳子厚, 『朝光』, 1940.3.)
  • 「朝鮮負褓商」(文定昌, 『春秋』, 1942.5.)
  • 「朝鮮にわげる 契の普及」(善生永助, 『朝鮮學報』 7, 1955)
  • 「開城の商人と商業慣習」(善生永助, 『朝鮮學報』 46, 1968)

    [네이버 지식백과] 신용 [信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신용

credit ,  ]
요약
상대방이 일정기간 후 상환 또는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고 인정함으로써 물건 ·돈을 빌려 주거나, 지불을 연기하여 주는 일.

일반용어로는 타인을 신뢰하는 일이다. 차용인()의 의지와 능력에 대한 대주()의 신뢰에 근거해서 성립되는 대차관계이다. 신용은 신용거래의 대상에 따라 화폐신용과 실물신용으로 나누어지나, 오늘날의 경제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은 화폐신용이다.

또한 신용은 형태 ·기간 등에 따라 상업신용 ·은행신용 ·장기신용 ·단기신용 ·생산신용 ·소비신용 등으로 분류된다. 신용이 넓은 범위에 걸쳐서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 기초에는 상품의 유통과정에 근거를 둔 상업신용이 있다. 즉, 상품의 생산 ·판매에는 시간이 걸리며, 원재료의 투입과 판매에 의한 화폐의 회수에는 시간적 공간이 생기므로, 여기에서 원재료의 공급자는 대금회수를 상품의 판매완료시까지 연기하여 준다는 형태의 신용이 성립한다. 이에 의해서 대금지불의 지시서 형식을 갖춘 환어음이나 대금 지불을 약속하는 약속어음이 생겨났다. 또한 매매 쌍방의 사이에서 성립되는 신용에 대하여 상품의 생산 ·판매와는 관계없이 여분의 돈을 가진 사람이 그 돈을 빌려주는 경우를 화폐신용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원재료를 판 사람이 구입자로부터 받은 어음을 이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할인해 받으면 상품판매를 기다리지 않아도 현금이 회수된다. 빌려주는 측에서는 판매자의 채권을 대신 행사하여 기일에 어음발행인으로부터 화폐의 상환을 받는다.

화폐신용이 발달함에 따라서 다수의 현금보유자로부터 유휴화폐를 예금의 형태로 받아들여 자기책임하에 이를 대출하는 신용의 중개기관, 즉 은행이 성립하였다. 은행이 한편의 당사자가 되는 신용이 은행신용이며 화폐신용의 한 형태이다. 은행신용의 기초는 예금자의 은행에 대한 신뢰로서 은행은 이 신뢰에 기반을 두고 신용을 창조한다. 신용은 자본주의 경제의 유지 ·발전에 있어 불가결한 제도이다.

역참조항목
금융의 규제무역금융신용거래신용인플레이션신용판매신용훼손죄증거금

[네이버 지식백과] 신용 [credit, 信用] (두산백과)


맑스사전

신용

 , Kredit , credit ]

신용이란 금전을 대차할 때 근거가 되는 것으로 인격적 신용, 혈연관계, 담보물건 등 다양한 것이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그 내용은 결국 변제능력이며 금전을 빌려주는 쪽이 변제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의 주기적 재생산운동에서의 화폐순환 속에서 변제 가능성을 발견하고 신용의 근거로 삼고 있다. 자기 증식하는 자본 자체가 신용을 매개로 하여 현실 화폐를 필요로 하는 것은 '유통시간의 지양' 때문이다. 

생산에서 판매를 거쳐 현실 화폐를 획득한 뒤에 다음의 생산을 시작하는 것에서는 판매기간에 의한 생산의 중단이 발생하고 만다. 판매기간에 의한 중단을 피하는 것이 '유통시간의 지양'이며 이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상인자본이다. 이 단계에서 상인자본은 화폐자본을 대부해 생산적 자본을 위해 단계 W-G를 단축하는 상품취급자본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또한 생산규모가 확대하면 할수록 '유통시간의 지양'을 위한 신용량은 증대하기 때문에 유휴화폐를 효율적으로 집적해 화폐자본으로서 상인자본에 공급하는 근대적 신용제도의 확대 · 발전을 촉진한다. 이렇게 되면 상인자본은 반드시 직접 상품을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를 거래하는 화폐거래 상()자본으로서 근대적 금융업자로 전화해 간다.

『자본』에서는 상인자본이 생산적 자본을 위해 단계 W-G를 단축하는 적극적 기능을 제3권 제4편 '상인자본'에서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독립화한 상인자본이 가상적인 수요에 의해 재생산과정을 한계를 넘어 확대하고 내적 관련이 폭력적으로 회복될 수밖에 없는, 즉 공황에 의해 조정되는 수준으로까지 밀고나간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유휴화폐를 효율적으로 집적하는 근대적 신용제도 하에서는 단계 W-G를 단축함으로써 자본의 운동을 효율화하고 자본의 회전을 높이는 동시에 상인자본이 신용 공급함으로써 현실의 판매와는 무관하게 다음의 생산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이러한 가상적인 수요에 의해 생산과 소비의 내적 관련이 단절되어 불안정한 구조를 발생시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신용관계를 자본의 재생산운동에 입각해 해명하는 것이 신용론에서의 맑스의 과제이며 『자본』 제3권 제5편, 특히 제25장 이하에서 논의되고 있다. 신용의 근거는 변제 가능성이며 그것을 담보하는 것이 자본의 순조로운 주기적 운동이지만, 자본의 운동은 반드시 주기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황이라는 폭력적 조정이 이루어진다. 게다가 공황이 먼저 출현하여 폭발하는 것은 직접 소비에 관계되는 소매업이 아니라 도매업이나 그것에 신용을 공여하는 은행업 부문이라는 인식이 맑스로 하여금 신용제도에 대한 연구에서 상인자본으로부터 이자 낳는 자본으로 서술을 진전하게끔 하고 있다.

-시바타 다케오()

참고문헌

  • 大內力, 『信用と銀行資本』, 東京大學出版會, 1978.
  • 山口重克, 『競爭と商業資本』, 岩波書店, 1983.

    [네이버 지식백과] 신용 [信用, Kredit, credit] (맑스사전, 2011. 10. 28., 도서출판 b)

용어해설

신용

출처 농업용어사전: 농촌진흥청 | 신용
  • 재화나 화폐의 급부와 반대급부와의 사이에 시간적 차이가 있는 일반 교환.

    외국어 표기 credit(영어), 信用(한자), しんよう(일본어)

출처 매일경제 | 신용
  • 차입능력 또는 배달후 일정기간 지급을 연기하고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용 (용어해설)

원불교대사전

신용

 ]

믿고 씀. 믿고 의심하지 않음, 틀림없을 것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평판이 좋고 인망이 있음. 경제에서 재화나 화폐의 급부와 반대급부와의 사이에 시간적 거리가 있는 일반 교환. 정산종사는 신용은 처세의 근본이 된다고 했다(《정산종사법어》 무본편1).

[네이버 지식백과] 신용 [信用] (원불교대사전,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외상1

발음  [외ː상/웨ː상]

명사

  1. 1.돈은 나중에 내기로 하고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
    • 외상 사절.
    • 외상 술값.
    • 외상을 달다.
    • 외상으로 먹다.
    • 외상으로 사다.
    •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에서는 외상은 사절입니다.
    •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집세 내고 외상 술값 갚고 나니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 가: 사장님, 여기 손님이 엄청 많네요. 돈 많이 버시겠어요.
      나: 손님은 많은데, 죄다 외상으로 먹는 손님이라 그렇지도 않아요.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외상을 긋다

‘외상’을 왜 긋는다고 할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상을 참 좋아하기도 하고, 또 외상을 후하게 주기도 한다. 외상을 하고 외상을 주는 일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드문 일이라고 하니 ‘외상’은 어찌 보면 우리의 독특한 상거래 행위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상’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예전부터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라는 속설이 생겨났을까?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외상을 주고받는 데 익숙해진 것일까? 일설에는 친족()을 중심으로 모여 살다 보니 남다른 정이 싹트고 또 믿음이 형성되어 외상 거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본다. 말하자면 상부상조()의 전통에서 외상 거래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수확이 끝나는 가을철에야 목돈을 만지게 되는 농경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춘궁기()에 외상을 지는 습성이 생겨났고, 그것이 굳어져서 외상 행위에 익숙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외상’을 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은 있을 수 있지만, ‘외상’은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정이나 한 국가까지 망치게 하는 나쁜 습성이므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외상’은 예전에는 주로 술집에서 이루어졌다. 그것도 싸구려 술집인 선술집이었다. 막걸리 몇 사발 사 먹을 돈도 없으면서 술 없이는 못 사는 술고래들이 상습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외상’이었다. 술 외상이 얼마나 많았으면 ‘외상술’이라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얼큰히 취한 술꾼이 그동안의 안면을 무기로 “아줌마(주모), 외상이야. 달아놓으시오”라고 하면 술집 여자는 상습적인 외상이 못마땅하지만 마지못해 응대해 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선술집 주모는 일자무식이어서 외상 사실을 장부에 적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벽에다가 마신 술잔 수만큼 작대기를 긋는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작대기만 긋는 것이 아니다. 외상술을 먹은 사람의 특징을 벽에 그린 뒤에 그 밑에 먹은 잔의 수만큼 작대기를 긋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가령, 코가 큰 사람은 코를 그려 놓고,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사람은 점을 찍어 놓고, 쌍둥이 집 남자라면 두 개의 사람 머리를 그려 놓고 그 밑에 줄을 긋는 것으로 외상 장부를 대신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외상을 긋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외상 작대기를 긋다’가 될 것이다.

외상술에 이골이 난 술꾼들은 그 ‘작대기’를 ‘어그 라인’이라고 멋을 부려 말하기까지 했다. ‘어그 라인’의 ‘어그’는 ‘긋다’의 활용형 ‘그어’를 거꾸로 말한 것이며, ‘라인’은 작대기 선을 영어로 바꾼 것이다. 이런 말장난을 할 줄 아는 술꾼이면 그래도 낭만을 아는 술꾼이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외상할 때 ‘긋는’ 행위는 술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전의 반찬가게나 푸줏간에서도 외상한 물건값을 ‘긋는’ 방법으로 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벽에다가 작대기를 긋는 것이 아니라 ‘엄대’라는 막대기에 길고 짧은 금을 새겼다. ‘엄대’에다 외상한 물건의 분량만큼 금을 새겨 놓고 나중에 몰아서 계산을 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엄대를 긋다(물건을 외상으로 사고 장부에 달다)’이다.

술을 외상으로 먹을 때는 벽에다 ‘작대기’를 긋고, 물건을 외상으로 살 때는 ‘엄대’에 금을 그으니, ‘긋다’라는 동사에 ‘외상값을 적다’는 의미까지 생겨날 만하다.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긋다’에 ‘물건값이나 밥값, 술값 따위를 바로 내지 않고 외상으로 처리하다’는 의미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외상을 긋다 - ‘외상’을 왜 긋는다고 할까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2009. 9. 25.)


거래에서 매매계약이 성립되어 상품이 인도되었지만, 그에 대한 대금은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결제되는 거래를 말하며, 외상매매 또는 신용거래(credit transaction)라 한다. 이러한 신용거래는 신용을 믿음으로써 장래 채무를 지급하는 대차관계가 발생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외상거래 (회계·세무 용어사전, 2006.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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